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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래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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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1월10일).

나는 어쩔 수 없이, 랭보를 떠올렸고,

아무래도 그에 걸맞는 커피레시피는 '내 심장의 임무', 에스프레쏘 리쓰뜨레또.

그 검은 액체를 내 심장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삶이든, 커피든, 두 번이 없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베를렌이 랭보와의 사랑을 회상하며, 아마도 나지막히 읊조렸을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

검은 액체는 내 심장에 묻고 있었다.

네 생애 가장 빛나는 죄악이 있니? 너는 살아가는 동안, 그걸 만날 수 있겠니?

글쎄... 동성애까지는 내 취향이 아니니까, 그럴 것까진 없겠지만,

나는 심장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이야길 건넸다.

삶이야말로, 어쩌면 꾸역꾸역 삼켜야하는 비루한 생과 일상이야말로,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이지 않을까.


.... 물론, 내 심장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검은 액체를 꿀꺽~ 삼켰을 뿐...



젠장, 바람 참 많이도 분다. 너도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를 그리는 것이냐.

아니면, 랭보의 시마냥,

삶의 터전에서 쫓아내고, 퇴출시키며, 강제출국이나 시킬 줄 아는, 

이 기똥차게 엄한 시대, 찬바람을 막아주는 존재가 없음을 한탄하는 것이냐. 

<토탈 이클립스>라도 보고 싶은 날이다... 하~~~


자고로, 시인이 위대한 이유는,

사회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는 몸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랭보가 그랬듯, 우리에게 지금 이 시대의 진짜 시인이 필요한 까닭이다.

그러니까, 랭보의 이말도.

"시인은 길고, 거대한 타락에 바탕을 둔 모든 감각을 통해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1871년 5월 폴 드메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나는 차츰 그가 세상과 절연했던 나이에 도달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시인도 아니요, 꽃미남도 아니기에,

어느 순간, 그가 살았던 시간을 훌쩍 건너뛸 것이다.

다행스런 일이지. 하~~~


에라잇, 술 모임이나 가야지~ 랭보를 위하여~

오늘 누가 랭보를 떠올리기나 하겠냐만.

뭐, 어때. 내가, 내 심장이, 바람구두를 얘기하잖냐.

당신의 랭보는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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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 랭보

11월에 생각하는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침상 주위에 헝클어진 것들은 흡사 상복 같은데,

살을 에이는 듯한 겨울의 북풍은 문간에서 탄식하고,

방안에 음산한 바람을 가득히 불어넣는다.

한 차례 휘둘러보기만 하여도 무엇이 부족한가를 누구나 알 수 있다.

이곳에 있는 두 어린아이에게는 어머니가 없는 것이다.

사랑 가득한 미소로,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어린아이들을 지켜보는 어머니가 없는 것이다.

(...) 어린이들 몸 위에 모피나 이불을 자상하게 덮어주는 일도 잊었단 말인가.

“미안하다!”라고 한마디 말한 다음, 떠나기 전에,

새벽녘의 추위로 어린아이들이 감기 들지 않도록

문을 꼭꼭 닫아주어 찬바람을 막아주는 일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어머니의 꿈, 그것보다 더 따뜻한 침구도 없을 것이다.

아름다운 새들,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몸의 균형을 잡고 있듯이

손발이 얼어버린 이 어린아이들은 아름다운 환영으로 가득 찬 감미로운 꿈을 장만한다.

- 아르튀르 랭보, 「고아들의 새해 선물」 중에서 -


열다섯 살, 아직은 청소년이었던 아르튀르 랭보(Jean Nicolas Arthur Rimbaud) (1854.10.20 ~ 1891.11.10)의 데뷔작은, 어쩐지 지금의 우리 시대를 연상 시킨다. 어머니가 없는 시대. 찬바람을 막아주는 일을 하는 존재의 부재에 시달리는 우리들. 열다섯의 천재시인의 눈에 비친, 어머니 없는 고아들의 시절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우리들. 찬바람이 불어줄 이즈음, 랭보를 떠올리는 이유다.


그러나 이 천재시인은, 가을도, 겨울도 아닌 어정쩡한 계절, 방랑이 질퍽댈 것 같은 11월, 세상과 절연했다. 아무 말 없이 훌쩍 떠난 연인처럼, ‘바람구두’를 신고 떠났다. 그것은 아마 외로움과 불화 때문이었으리라.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폴 베를렌과의 격정적인 연애를 끝내고 세상에 삼투압하지 못한 천재가 택할 수 있었던 마지막 카드.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았기에, 시큰둥해져버린 생. 더디 가는 법을 알았더라면, 그의 예술적 탐험은 조금이라도 더 가능했을까.


반항과 불화가 만든 시 세계


우리가 아는 랭보의 모든 것은 불과 5년, 열다섯부터 스무 살 무렵에 이뤄진 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조숙한 천재를 만든 것일까. 그의 생을 잠깐 훑어보자. 보병 대위였던 아버지는 일찍 집을 버리고 나갔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 아래서 자란 그는, 뛰어난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과도한 엄격함과 아버지 없는 결핍감 사이에서 랭보는 반항을 꾀하고 자유를 갈구했다. 중학시절 은사였던 조르주 이장바르에게 문학적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열여섯 살, 학업을 포기했다. 이듬해 스승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모든 감각의 타락을 통해서 절대자에게 도달”하겠다고 선언한 그는, 탕아적이고 반항적인 천재의 기질을 발산하기 시작한다. 열일곱,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천재의 행보는 ‘견자(見者, voyant)’라는 말로 압축된다.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프랑스 철학자 엘베시우스, 루소와 보들레르 등으로부터 문학적․사상적 자양분을 흡수한 그는, 가출을 하고 방랑을 일삼았다. 시도 함께 익어갔다. ‘시인은 사회의 환부를 남보다 먼저 감지하는 몸을 지닌 존재’임을 증명하듯, 그의 시는 세상을 꼬집고 흔들었다. 동시대 유럽문명에 대한 회의, 부르주아 도덕에 대한 혐오, 제 구실을 못하는 종교적 교리에 대한 경멸, 우월주의에 빠진 식민통치자들의 거만함과 물질만능주의에 젖은 부패와 타락을 향한 개탄 등 그는 시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은 혁명론자이기도 했다. 즉, 시인은 우주의 무한한 시공간을 꿰뚫고 개인에 대한 인습적 개념을 형성하는 제약과 통제를 무너트리는, 예언자적인 견자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시 세계를 펼쳤다.


십대의 천재시인은 그렇게 기존의 문학을 초월하려는 일대 모험에 나섰다. 그가 처음 견자라고 믿었던 시인이 바로, 폴 베를렌이었다. 대중들에게 세기의 스캔들로 더욱 많이 회자되는 랭보와 베를렌의 사랑. 대작이었던 「취한 배」를 들고, 그는 베를렌과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1871년, 랭보는 열일곱의 나이였다. 문학적으로 서로에게 매료된 두 사람에게 닥칠 운명은 바로 어찌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당시 베를렌은 결혼한 상태였지만, 끌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관계도 영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방랑의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아내와 랭보 사이에서 베를렌은 때론 갈팡질팡했고, 랭보는 지나치게 집착했다. 1873년 브뤼셀에서 술에 취한 베를렌이 랭보와 논쟁을 벌이다, 권총을 쐈다. 랭보는 왼손에 상처를 입었고, 베를렌은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이 두 사람의 이별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랭보는 이 2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표작인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썼다. 베를렌은 이때를 “나의 가장 빛나는 죄악”이라고 회상했다. 형용모순이 빚어내는 이 아찔한 생의 기억, 예술가들의 특권일까. 베를렌이 랭보에게 붙여준 별명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다. 하지만 천재에게도 힘겨운 시기는 상흔을 남기는 법인가보다. 문학적 열의가 식기 시작했는지 랭보는 살 길을 모색한다. 그 시기를 관통하는 산문시집 《일루미나 시옹》(1886)은 프랑스 산문시의 최고봉으로 손꼽히기도 하지만, 랭보에게 더 이상 시는 모든 것이 아니었다.




바람구두를 신고 떠난 모험가


아, 나는 이제 인생에 아무런 미련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의 삶 자체가 매우 피곤한 것이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습니다.

요즘은 하루하루가 피곤의 연속이며 기후 또한 참기 어렵습니다.

(…) 인생이 단 한 번으로 끝난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하라르에서 쓴 랭보의 편지 중에서 -


부르주아와 물질만능의 부조리를 십대에 깨닫고 이를 조롱하고 저주하며 시대를 거스르던 랭보는 그래서 모험가였다. 예술적 방랑도 너무도 많은 체험이 압축된 탓일까. 새롭고 물질적 세계를 향한 마음의 쏠림 역시 강했다.


예술적 자유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스무 살이 넘자 문학을 단념했고, 예술적 자아를 배신했다. 시를 황금과 상품으로 바꿨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무대로 상인이자 무기밀매상으로 남은 생을 보냈다. “오만이 잃어버린 자비보다 낫다”며 예술적 자유인으로서의 오만은 풀이 꺾인 것이다. 그것이 견자로서의 또 다른 방랑이었을지 모르겠으나, 그는 ‘돌아온 탕아’와 같은 레떼르를 거부했다. 시인과 무기밀매상의 간극이 메워지진 않지만, 한편으로 시 역시 세상에 저항하는 랭보만의 무기였음을 감안하면, 그것은 그만의 극적인 선택이 아니었을까.


그토록 혐오하던 물질세계에 빠져 지내다 한쪽 다리를 절단(매독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있다)하고, 홀연히 서른일곱의 나이로 쓸쓸히 맞이한 죽음. 삶을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마냥 보내다 요절한 바람구두. 그 바람구두의 생이 끝난 지점은 11월이 맞다. 인생이 단 한번으로 끝난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그를 떠올리기에도 11월은 어울린다. 다만 이것은 거의 확실하다. 누구나 한번쯤은 격정의 시절을 관통하면서 랭보에 매혹당할 순 있겠지만, 두 번은 없다. 랭보 역시 그러했으므로.



[문화예술 크리틱 저널 - 뷰즈 2009 11·12월호 기고]
posted by 낭만_커피